책소개

그 빈터\n\n\n우리가 오랫동안 잃어버리고\n까마득히 잊고 있었던\n옛 절터나 집터를 찾아가 보라\n우리가 돌아보지 않고 살지 않는 동안\n그곳은 그냥 버려진 빈터가 아니다\n온갖 푸나무와 이름 모를 들꽃들이\n오가는 바람에 두런거리며\n작은 벌레들과 함께 옛이야기처럼 살고 있다\n밤이 되면\n이슬과 별들도 살을 섞는다\n\n우리는 살아가면서\n가진 것들을 하나씩 잃어버린다\n소중한 이름과 얼굴마저 까마득히 잊어버린다\n그렇게 많은 것을 잃고 잊어버린 마음의 빈터에\n어느 날 문득 이르러 보라\n무성히 자란 갖가지 풀과 들꽃들이\n마파람 하늬바람과\n작은 새 풀벌레들과 오순도순 살고 있다\n그 드넓은 풀밭과 들꽃들 위로 지는 노을은\n아름답다\n참 아름답다.\n- 『나는 거기에 없었다』\n\n\n\n\n말을 배우러 세상에 왔네\n\n\n말을 배우러 나는 이 세상에 왔네\n말을 익히며 말을 따라\n산과 바다와 들판을 알았네\n슬픔이 어떻게 저녁 못물만큼 무거워지는지\n삶의 쓰라림과 희망이\n어떻게 안개처럼 유리창에 피고 지는지\n말을 따라 착하게도 많이 배웠네\n이제 아이들에게 말을 가르치면서\n말을 배우러 이 세상에 왔노라고\n나는 다시 한번 새삼 깨닫네\n더 깊고 더 많은 말을 배우기 위해\n이제는 익힌 말을 다시금 버려야 하네\n가을 산이 잎 떨군 빈 가지 사이로\n아주 먼 길을 보여주듯\n말 떨군 고요의 틈으로 돌아가서\n푸른 파도가 밤낮으로\n바위에게 웅얼거리는 소리를\n쪽동백이 날빛에 흰꼬리새 부르는 소리를\n이제는 남김없이 들어야 하네\n그 말을 배워야 하네\n아이들에게 말을 가르치고\n말을 배우러 나는 이 세상에 왔네.\n- 『나는 거기에 없었다』\n\n\n\n\n배롱나무꽃 그늘\n\n\n사랑하는 이여\n사람은 너무 크거나 작은 것들은\n아예 듣도 보도 못하나니\n제 이목구비만한 낡은 마을을 세우고\n때도 없이 시끄럽게 부딪치나니\n사랑하는 이여\n이제 이 마을 살짝 벗어나\n너무 크고 작아 그지없이 고요한 곳\n저 배롱나무 꽃그늘에서 만나기로 하자\n그 꽃그늘에 고대古代의 호수 하나 살고 있고\n호수 중심에 고요한 돌 하나 있으니\n너와 나 처음 만난 눈빛으로\n배롱꽃 등불 밝혀 돌 속으로 들어가\n이제 그만 아득히 하나가 되자.\n- 『나는 거기에 없었다』

저자소개

국문학자, 시인. 배재대학교 인문대 명예교수. 시집에 『썩지 않는 슬픔』, 『나는 거기에 없었다』등 다수. 저서에 『도의 시학』, 『도와 생태적 상상력』 등 다수. 옮긴 책에 『삼국유사』,『구운몽』 등이 있다.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