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현장\n\n\n쇠죽 끓듯 하는 출근길\n여자 하나가 방금 치인 듯\n마치 목 비틀린 풍뎅이처럼\n사지를 따로따로 바둥거리며\n피칠갑을 하고 길을 쓴다\n그 여자가 다칠까 보아\n차량들이 조심조심 우회하고\n행인들은 재수 없는 날이라고\n너그럽게 자신의 일진을 탓하며\n고이 비켜 간다\n두어 시간 뒤\n다행히 순찰차로 병원에 옮겨져\n의사가 자세히 보는 앞에서\n여자는 안심하고 죽는다\n한 시간만 일렀다면 살 수 있었다고\n의사는 전문가답게 말한다\n그러나\n한 시간을 당기고 늘이는 일은\n인력으로 못하는 일이다.\n- 『썩지 않는 슬픔』\n\n\n\n\n미루나무\n\n\n그대가 그리우면\n나는 때로 먼 하늘을 바라본다\n거기 아슬한 하늘 깊숙이\n빈 둥지를 안고 홀로 서 있는\n그림자 여윈 미루나무 한 그루\n\n마른 삭정이와 바람으로\n겨우 성글게 얽은 둥지 하나\n그대가 하냥 그리울 때면\n저 여윈 키의 높이\n그 빈 가슴 성긴 틈새로\n말없이 먼 하늘을 바라본다.\n- 『썩지 않는 슬픔』\n\n\n\n\n무지개\n\n\n흔들리는 그네에 앉아서 보면\n먼 산이 가까워지고\n가까운 산이 멀어진다\n바다가 산이 되고 산이 바다가 된다\n\n흔들리는 그네에 앉아서 보면\n이 마을과 저 마을이 하나가 되고\n양달과 응달이 하나가 된다\n그네는 흔들리면서\n이쪽과 저쪽을 지우고\n그네에 앉아 있는 그대마저 지우고\n마침내 이 세상에\n빈 그네 제 그림자만 홀로 남는다\n\n흔들리는 사이\n그 빈자리\n하늘빛처럼 오래오래\n산새 알 물새 알은 반짝이고\n풀꽃들은 피고 지리라\n\n눈부신 싸움\n허공에 그어지는 저 포물선\n아름다운 무지개는\n영원히 그렇게 뜨고 지리라.\n- 『썩지 않는 슬픔』

저자소개

국문학자, 시인. 배재대학교 인문대 명예교수. 시집에 『썩지 않는 슬픔』, 『나는 거기에 없었다』등 다수. 저서에 『도의 시학』, 『도와 생태적 상상력』 등 다수. 옮긴 책에 『삼국유사』,『구운몽』 등이 있다.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