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아구\n- 잠언 1\n\n\n온통 입뿐이어서\n웃음이 절로 나는 그놈을\n저녁거리 삼아 배를 갈랐다\n기분 나쁘게 미끈거리는\n그 어둡고 답답한 내장 속에\n아주 작고 이쁜 입을 가진\n통통하게 살 오른 참조기 한 마리가\n온전히 통째로 들어 있지 않은가\n큰 입 작은 입 보글보글 함께 끓여서\n오랜만에 째지게 맛있는 저녁을\n아귀아귀 먹어치우기 시작한다\n그러다가 문득\n저 텅 빈 허공의\n주린 뱃속을 둘러보면서\n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어본다\n저 광대한 허기 속에서\n우리들은 시원하게 숨 쉴 수도 있고\n모두가 공평하게\n아주 서서히 소화되는 동안\n이렇게 맛있는 것들을 즐기면서\n아직 살찔 수 있다니\n얼마나 다행한 일인가.\n- 『썩지 않는 슬픔』\n\n\n\n바다\n\n\n바다는 벙어리의\n귓속에 잠들어 있고\n\n바다는 벙어리의\n붉은 가슴속을 출렁이고 있고\n\n달려도 달려도\n캄캄한 대낮은 이마 위로\n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고\n\n울음 속에 빠뜨린 그물은\n영원히 찾을 길 없고\n\n살아있는 죽음이여\n한 개의 돌멩이 속에 입적入寂하라\n\n달려도 달려도\n바다는 벙어리의\n입속에 돌멩이로 굳어 있고\n육지 하나 끝없이 누워 있고.\n- 『썩지 않는 슬픔』\n\n\n\n이빨\n\n\n아주 작은 한 사내가\n초겨울의 땅거미를 밟고\n감옥소의 철문을 나온다\n언제나 그랬듯이\n외진 가로수 밑으로 걸어가\n아주 작게 웅크리고 앉아서\n그보다 더 작은 어머니가 내놓은\n두부를 말없이 먹는다\n거듭되는 징역살이에\n몸은 이미 거덜 난 지 오래지만\n아직도 튼튼한 이빨 하나로\n겨우 버티고 있는 그가\n이빨은 소용없으니 세우지 말라고\n조용조용히 일러주는\n물렁물렁한 두부를\n고개 수그리고 묵묵히 먹는다\n지상의 촘촘한 그물코에 갈앉은\n초겨울의 어둠 속\n이윽고 달무리처럼\n그의 이빨만 하얗게 남는다.\n- 『썩지 않는 슬픔』

저자소개

국문학자, 시인. 배재대학교 인문대 명예교수. 시집에 『썩지 않는 슬픔』, 『나는 거기에 없었다』등 다수. 저서에 『도의 시학』, 『도와 생태적 상상력』 등 다수. 옮긴 책에 『삼국유사』,『구운몽』 등이 있다.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