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책 속으로

하루, 길어야 이틀 묵는 방랑자 같은 여행 생활을 계속 하다보니 이제는 두 번만 같은 곳을 지나가도 우리 동네 같은 느낌이 든다. 처음 길을 걸을 때 워낙에 긴장을 바짝 하고 다녀서 그런지 두 번째는 대개 지도가 없어도 충분히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쌀국숫집을 찾아 걷는 이 길은 무려 세 번이나 지나가는 길이기도 했다. 그만큼 호치민은 좁다기보다 여행자들의 동선이 한정적인 곳이었다. 대낮의 여행자 거리는 그래도 무서운 느낌이 덜했다. 내가 두 번째 온 거라 그럴 수도 있었다. 내가 보는 이 거리의 여행자들이 그제의 여행자들은 아니겠지만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이곳은 새로운 여행객들로 가득 메워질 것이다. 나 역시 이 거리를 잠시 스쳐가는 사람 중 하나가 되겠지. 활기 넘치는 이 거리에서 더위와 일상에 지친 표정으로 음식을 파는 노점상들의 표정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비좁은 인도에 오토바이들을 가로로 세워두니, 나는 수시로 인도와 차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길을 걸어야 했다. 대체 왜 이렇게 오토바이를 세워두는 걸까.

음. 좀 불편하군. 했던 것들이 그새 익숙해지는지 조금은 짜증도 났다. 미로를 걸어가듯 요리조리 걸어 도착한 쌀국숫집은 밤보다는 굉장히 정겨운 느낌이 났다. 주인집 아저씨는 내 얼굴을 단박에 기억하고 활짝 웃어줬다. 여행지에서도 이런 단골 식당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니. 한국에서는 달랑 두 번 방문에 느끼긴 어려운 일일 거다. 이번에는 쌀국수 한 그릇만 주문하고 앉았다. 여행의 마지막 쌀국수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몇 번 쌀국수를 먹었지만 분명히 무언가 다르긴 다른데 어떻게 다른지를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나는 현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을 느낀 것 같다. 본래 내 입맛은 날씨가 조금만 더워도 국물 있는 뜨거운 음식을 거부한다. 그런데 어째서 이 나라에 와서는 30도가 넘는 날씨에 에어컨도 없는 식당에서 이렇게 맛있게 쌀국수를 먹을 수가 있는 건가. 내가 생각해도 신기했다. 한 그릇을 채 못 먹고 남기고 마는 내 위도 제법 포용력이 생겼는지 한 그릇을 금세 국물 째 흡수해 버렸다.

계산을 하며 오늘 한국에 돌아간다고 말하자 아저씨는 놀라운 ‘슬픈 표정’을 보여주셨다. 날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정말 잊지 못할 식당이라고, 음식도 맛있었고 한국에 가서 꼭 이야기하겠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나의 표현력이 모자랐고 아저씨의 영어실력이 모자랐다.



쌀국숫집 주변에 마침 신또 노점이 있었다. 어느 블로거는 ‘여행자거리 어떤 매장 근처에 어디쯤 있는 노점’이라고 정말 친절하게 설명해줬지만, 신또가 다 비슷한 맛일 거라고 생각했다. 호이안에서 갔던 반미집처럼 신또 노점 앞에도 작은 평상이 깔려 있었다. 진열되어 있는 과일들은 희한하게 때깔부터가 달랐다. 가끔 한국 대형마트에 동남아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는 걸 보면 참 시들시들한 게 먹기 싫게도 생겼다. 확실히 이곳은 작물이 자라기 좋은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과 과일 종류가 쭉 쓰인 메뉴판을 보다가 파인애플 신또를 주문했다. 신맛을 원해서 파인애플 신또를 주문하긴 했는데 마지막인데 베트남 과일로 주문할걸 그랬나, 하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주문한 신또가 나왔는데 으잉? 용과 신또다. 나는 분명 파인애플을 주문했는데.. 아주머니는 신또를 건네준 후 아무 말없이 청소에 열중했다. 용과 신또를 받아들고 조금 생각하다가 그냥 먹기로 했다. 여행 중 먹었던 흰색 용과가 아니라 분홍색 용과이기도 했고 다시 해달라고 요청하기에는 내 기준이겠지만 신또의 가격이 너무 쌌으며 마침 생각도 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나는 분홍색 용과를 맛볼 수 있었다.





우연히 맛보게 된 용과 신또



의자에 앉아 여행자 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신또를 먹고 있으니 정말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나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외국여행자들이 근처에 있는 음식들을 사 먹기도 하고, 내 곁에는 몇몇 한국인들이 앉았다 가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오늘이 첫 날인 사람들도 있었는데, 정말, 많이 부러웠다.

첫째 날인 것도 부럽고 첫날이라 어쩔 수 없이 가진 두려움도 부러웠다. 어제 야시장 이후로 두려움이 거의 없어진 나는, 오토바이 아저씨라도 또 올 테면 와보라지 하는 마음으로 여행자 거리를 휘저었으니까.

베트남의 뜨거운 날씨는 나를 마지막 날까지 지치게 만들었다. 겨우 몇 시간 나와 있었을 뿐인데도 아까 식당을 찾으며 고생을 해서 그런지 신또를 먹어도 축축 처져만 갔다. 체크아웃 후에도 샤워실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한국인 호텔 직원의 말이 생각났다. 호텔로 돌아가 깨끗이 샤워를 해서 옆 승객에게 냄새 고문을 주지 않겠다 다짐하고는 일어섰다. 호텔로 가는 길은 이제 눈에 훤히 들어왔다. 셔틀이나 택시를 타지 않고는 갈 수 없다 생각했는데 긴장을 하니 생각보다 지리가 잘 외워진다는 것에 놀랐다. 한국에서도 지독한 길치인 내가, 여행을 와서 지리를 익히는 법도 배웠다. 호텔 방향으로 걷다가 걷다가 지쳐갈 때 쯤 택시를 탔다. 호텔까지 가는 방향을 알다니. 이것도 내겐 여행 중 얻은 큰 수확이었다. 택시를 타니 날이 살짝 저물었다. 호치민에 밤이 오고 있었다.

내일이면 나는 더 이상 이 도시에 없겠지. 그래도 호치민에는 언제나 그랬듯 내가 겪은 매일매일이 이어질 것이다. 먼 훗 날 그 호치민의 일상 중의 어느 날, 내가 다시 합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저자소개

호기심 가득한 눈과 따뜻한 심장을 가지고 드넓은 세상을 여행하듯 살아가고 싶은 꿈꾸는 별.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 있다. 그래서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한국외대 체코?슬로바키아어과를 졸업하고, 한국외대 글로벌 문화콘텐츠학과 석사를 졸업했다. 현재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 박사 과정 중이며, 프리랜서 문화/지역 연구가 및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소설 <칸타빌레 메모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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